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OB 베어스 (문단 편집) === 1989년 ~ 1994년 === 1989년 [[이광환]] 감독이 취임. 그는 당시 한국야구의 대세였던 일본식의 관리야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선수들 개개인에 개성과 책임감을 믿고 맡기는 '자율 야구'의 기치를 들었다. 첫 시즌이었던 89년에는 개막 1승9패로 최악의 스타트를 보인 뒤 후반기 시작 후 상승세를 타며 -11에서 5할을 찍는 저력을 보였으나 다시 연패에 빠지며 태평양, 삼성과의 4위권 경쟁에서 낙오되며 최종순위 5위로 마쳤다. 이해 프로야구 역사상 첫 은퇴경기로 윤동균의 은퇴경기가 있었고 윤동균은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롯데의 김시진에게 2루타를 쳤다. 그러나 90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기존 투수력과 타선의 노쇠화가 한꺼번에 찾아보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붕괴. 5월부터 10연패와 11연패를 연달아 기록하면서 그 해 6월 19일 시즌 중 교체 되었다. 제4대 감독으로는 재미교포 출신으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던 [[이재우(야구감독)|이재우]]가 취임했다. 그는 1990년 감독 대행으로 기용되어 1991년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91 시즌에도 시즌 도중 12연패에 빠지는 등 부진한 성적으로 그 해 9월 9일 시즌 중에 교체되었다. 제5대 감독은 '''최초의 프로 선수 출신 감독'''으로 [[윤동균]]이 내정되었고, 그는 비록 탈꼴찌엔 아쉽게 실패했으나 감독 대행을 맡은 91시즌의 남은 경기를 5할의 승률을 기록하여 가능성을 보이며 정식감독 승격에 성공했다. 1992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그는 [[김민호(1969)|김민호]], [[장원진]], [[안경현]] 등의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고 [[김형석(야구)|김형석]], [[임형석]], [[강영수(야구)|강영수]], [[김상호(1965)|김상호]]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타선을 완성하면서 그 해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93년에는 초반에는 5위에 머무르다가 9월부터 강력한 선발투수진과 특급 신인 마무리투수 [[김경원(야구)|김경원]]을 앞세우면서[* 그러나 공격력은 별로 강하지 않았다. 팀 타율은 2위였지만 홈런 수에서 [[LG 트윈스|LG]]에 뒤졌다.] 연승을 시작해 마지막 경기에서 [[LG 트윈스|LG]]에게 승리하며 3위로 6년만에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끈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4위 LG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94년에는 우승후보라는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고전하면서 하위권을 맴돌았았다. 결국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4일, [[전라북도]] [[군산시]] 쌍방울 전에서 1-2로 패배하자 윤동균 감독은 '몽둥이를 들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자 윤동균 감독이 '맞기 싫은 선수들은 다 짐싸서 서울로 올라가라'라고 하였고 박철순 외 16명의 선수들은 이탈해 서울로 올라갔다. 선수들 중 최고 연장자인 [[박철순]]은 '윤 감독과 같이 옷을 벗겠다'라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 결국 9월 14일, 윤동균 감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고,[* [[박철순]], 김상호, [[김형석(야구)|김형석]], [[장호연]], [[강영수(야구)|강영수]] 등의 다섯 고참 선수들은 계약을 해지하기로 하였으나, 강영수만이 방출후 [[태평양 돌핀스]]로 입단 하게 되면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남은 시즌은 최주억 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이 사건이 바로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구단의 어두운 [[흑역사]]로 기록 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